발리의 낮 상상도

이 시리즈는 사주팔자에 없던 6박 8일 발리 여행에 대한 기록이자 발리까지가서 굳이 산을 타는 인간이 쓴 발리 여행기다.

난데없이 왜 발리인가...부터 말해보면, 3월 즈음 지인이 발리에서 친구들과 작은 페스티벌을 연다고 한 번 와 보지 않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물을 싫어하는 나로선 드넓은 해안과 수영복을 입은 핫가이들로 대변되는 발리를 이번 생엔 갈 일이 보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일상이 참을 수 없이 지루했던 터라 일탈 비슷한 거라도 해보고 싶어 날뛰던 시기였다. 그래서 알겠다고, 나도 끼워달라고 반쯤은 충동적으로 대답해버린 것이다. 거기에 '해외 페스티벌 원정 나가는 인싸'라는 아싸나 탐낼 만한 타이틀이 내심 맘에 들어버렸다. 솔직히 이게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발리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는 거라곤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섬이고 '발리에서 생긴 일'이라는 드라마가 있다는 쓰잘데기 없는 정보들 밖에.

급하게 '발리 할 것', '관광객 없는 발리 스팟'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발리 등산'을 검색해봤고 그 결과 발리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아궁(Agung)이라는 3,100m급 활화산을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 두 개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머리 속에 유적, 산 2개만 딱 넣어 놓고 발리로 떠나게 되는데.

5월 7일 아침. 비행기 시간이 3시 반이라 뭘 하기가 상당히 애매했다. 마냥 빈둥거리자니 좀이 쑤셔서 갓생 흉내 좀 내보려고 동네 뒷산에서 트레일 러닝을 조졌다. 왕복 3키로 정도 되는데 짧아도 경사가 스키점프대 수준이라 만만하게 볼 코스는 아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절이 하나 있는데 전날이 석가탄신일이라 아직 연등이 달려있었다. 여긴 여의도부터 잠실까지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 포인트가 있는데 숙련된 서울시민답게 '여기 불꽃축제 때 지리겠는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올해도 혼자 오긴 싫은데 결국 또 혼자 오겠지.

공항에 1시 반에 도착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집에서 12시쯤 나왔다.

이전엔 공항리무진을 타고 다녔는데 기후동행카드가 인천공항까지 커버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어 이번엔 철도를 이용해봤다. 전철이다보니 잠깐 잔다거나, 짐칸에 짐을 넣거나 할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공짜라는 사실이 모든 단점을 잊게 만든다.

도착후 처음 찍은 사진은 국제선 탑승 표지판 사진이다. 나만의 출국의식 같은 건데 국제선과 탑승이라는 글자가 주는 몽글몽글함이 있다.

체크인 후 표를 확인해봤더니 처음으로 100번대 게이트가 걸렸다. 103번 게이트로 이동해야 하는데 초록색 선을 따라가니 옆동으로 넘어가는 경전철을 탈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패킹 점검. 큰 가방은 이번에 새로 샀는데 그동안 알리에서 5만원 주고 산 네이처하이크로 버티다가 월급도 올랐겠다 오스프리 38L를 질렀다. 기분탓인지 몰라도 가방을 맨 건지 안 맨 건지 헷갈릴 정도로 편안했다. 역시 장비는 돈지랄이 제맛이다.

사실 60L 살려다가 기내반입이 안된다는 얘기가 있어서 줄인건데 곰방수준으로 들고 타는 거 아니면 딱히 막지는 않는 것 같다.

설레는 이륙 준비. 타고 갈 비행기는 말탈 많았던 제주에어인데 직항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다른 항공사보다 2배 저렴하기 때문에 나같은 가난한 여행자는 고민의 여지가 없다. 발리 왕복 30만원대가 말이 됨?

이번 비행의 목표는 데미안 완독이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심오해서 시간 죽이기에 어울리는 책은 아니었다.

여차저차 다 읽긴 했는데 악을 선으로 가리고 외면해서는 안되며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라고 나름 요약해봤다. 맞나?

비행기에서 못자는 체질이라 책 읽고 넷플릭스 보고 게임하고 그냥 온몸을 비틀다 발리에 도착했다. 8시간도 죽겠는데 유럽은 13시간씩 걸려서 어떻게 가는지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발리에 내리자마자 느낀 건 진짜 덥고 습하다는 것이다. 한국 여름 전성기랑 비슷한 것 같다. 이 때 서울 날씨 생각하고 밤에 추울까봐 바람막이까지 챙겼는데 쓸데없이 짐만 늘었다.

비행기 내려서 짐 챙기고 수속 하러 가는 길. 이 때쯤이 오후 11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오질나게 많다.

대부분 호주사람인데 호주가 발리랑 워낙 가깝다보니(4시간 거리) 우리가 일본 가듯이 간다고 한다. 거기에 물가는 1/3 수준이라 편의점이 다이소처럼 느껴지는 진귀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공항팁 몇개

발리 공항은 실내도 덥기 때문에 착륙 후 얼마간은 이성적인 사고가 힘들 수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한국에서 미리 해 가자.

  1. VOA는 미리 신청하고 오자.
    VOA라는 도착비자가 있는데 현장 신청하려면 줄이 백미터라 오기 전에 미리 신청하고 오는게 속이 편하다. eCustom이라고 전자세관신고도 해야 하는데 완료 시 나오는 QR을 미리 캡처해놓으면 쾌속출국이 가능하다.
  2. eSIM은 미리 등록해가자.
    발리 공항은 생각보다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 정확히 말하면 잡을 수는 있는데 빠르지도 않고 계속 끊긴다. 그러니까 eSIM을 미리 한국에서 등록해 가도록 하자.
  3. eSIM은 무제한이 속편하다.
    와이파이가 구린 호텔이 간혹 있는데 이럴 때 핫스팟 되는 무제한 요금제가 빛을 발한다. 가격도 7일 기준 2~3,000원 밖에 차이 안 나니까 맘 편하게 무제한 끊자.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면...

기내식 신청을 깜빡해서 반나절동안 쫄쫄 굶는 중이었는데 그 와중에 날씨는 푹푹 찌고, 데이터는 안 터지고, 택시도 못 잡고 멘탈 나가기 직전에 Jonny Rockets라는 패푸 체인점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여행 첫 끼를 햄버거로 떼우는 게 진짜 자존심 상해서 안 가려고 했는데 상태가 셧다운 직전이라 어거지로 들어갔다.

맛은 먹을 만한 정도고 특이한 점은 자리로 가져다 준다는 거? 다 먹고 쓰레기는 자리에 쿨하게 두고 가면 점원이 치워준다. 식기 반납대가 없어서 찐따답게 물어보진 못하고 건너편 양인들 집 갈 때까지 기다려서 알아냈다.

택시 잡으러 가는 길 사진을 못 찍었는데 이때까지도 데이터가 안 터져서 심신미약 상태에 빠져있었다.

오질나게 헤메다 그랩라운지에 도착했는데 누군가 능숙한 한국어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한국어에 능통한 그녀는 바로 그랩의 편에 서서 나같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봉사하는 직원이었다.

데이터 안 터지는 걸 보자 핫스팟까지 켜서 도와주셨는데 정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감사 표현을 잘 못한 것 같은데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신다면 정말정말로 고마웠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쇼.

여러 기연의 도움으로 안 죽고 스미냑의 호텔에 도착했다. 다행히 스미냑은 공항에서 크게 멀지 않아서 호텔까지 30분이 채 안 걸렸다. 자정 넘으면 체크인 안 된다는 괴담이 있어서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호텔에 특이하게 문신 후 안내문이 있다.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발리엔 타투한 사람이 많다. 어느정도냐면 서비스직 최전선이라고 볼 수 있는 호텔 컨시어지도 야쿠자 행동대장급 문신을 하고 있다.

첨에 봤을 땐 조금(많이) 쫄았으나 발리라는 동네 자체가 타투에 관대한 편이라 한국이라면 사회생활이 곤란할 정도의 타투를 한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타투샵도 편의점 수준으로 많다.

그런 문화에 너무 감화된 나머지 냅다 문신을 박아버리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안내문까지 만들었겠지.

인제 첫날 끝이다... 별 내용이 없는데 너무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고생밖엔 한 게 없어서 그렇다. 쨌든 하루 마무리하고 내일 있을 템플 투어를 준비하기로.

[발리 25.5.7] 한국 출국 & 발리 입국 & 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