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타고 가는 도중에 폭우가 내렸는데 올라가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많이 내려서 드라이버한테 물어보니 아침에 그친다고 괜찮다더라.
그래서 '당신은 오늘 장사를 공치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성적이라 '그렇군요'라고 하고 말았다.

일기예보도 보긴 했는데 이 동네 일기예보는 웬만하면 비 예보라 봐도 도움이 안 된다. 비가 안 오는 건 아닌데 30분 오다 3시간 맑다 30분 오다 다음날까지 안 오다 그런다.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가이드와 등반객이 접선하는 공간이 있다. 오늘 올라가는 사람은 20명 남짓인데 아시안은 가이드를 제외하면 나밖에 없었다.
산에 미쳐있는 나라들이 몇몇 있는데 서양인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 어쩌다 한 번씩 보이는 아시안은 일본을 찍으면 국적이 대충 맞는다.

등산 시작하기 직전 다행히 비가 그쳤다. 난 끝내 동행을 구하지 못해서 가이드와 단둘이 오붓한 산행을 하게 되었다.


1km 쯤 갔을까 이게 동남아구나 싶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하드쉘 꺼내 입으면서 이걸 왜 돈주고 하고 있나, 돈 다 줄테니까 그냥 내려가자고 할까 속으로 엄청난 갈등을 했는데 가는 데까지는 가보겠다는 가이드의 결연한 표정을 보니 말이 쑥 들어갔다. 너무 쉽게 포기할 뻔 했는데 어찌보면 고마운 일이다.
가다보니 오두막이 하나 나와서 먼저 숨어있던 선두 그룹과 '트럼프의 시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격조 높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출발했다.

아궁산이 발리에선 종교적 영산으로 여겨지다보니 등반 중간중간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가이드가 체크포인트마다 멈춰서 향을 하나씩 피우는데 잘 안 보이지만 사진에서도 가이드가 향을 피우는 중이다.
불 켠 김에 담배도 같이 피우시던데 우리나라 산이었으면 산림보호법에 의해 최대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으니 자제하여야 한다.
2천미터쯤 되니 슬슬 조망이 트이기 시작한다. 1천미터에서 시작했으니 2천미터면 이제 반 온거다.
아궁산 등반코스는 8km로 길이는 짧은편이지만 획득고도가 2km라 쉬운 코스는 아니다. 설악산 오색코스가 길이 4.5km에 획고 1,300m니까 km당 획득고도는 둘이 엇비슷하다.
오색코스가 국내 등산로 중에선 탑급 난이도로 분류되는데 아궁산은 오색코스의 1.8배쯤 되니까 난이도를 대충 계산해볼 수 있겠다. 야간등반 + 고산증 + 우중산행 3콤보는 덤이다. 아 다행스럽게도 이쯤 비는 멈췄다.
숨 넘어가는 표정으로 헥헥대고 있으니까 가이드가 사과를 하나 줬는데 와 산에서 먹는 사과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앞으로 내 행동식엔 무조건 사과 포함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축한 열대우림을 헤치고 올라오니 어느새 POS2 2,400m 지점에 도착했다. 식사거리를 가져온 사람들은 여기서 잠시 쉬면서 끼니를 해결했다. 여긴 야영이 가능한 포인트라 하룻밤 자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함께있다.

POS2에선 발리의 야경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었는데 달이 휘영청 밝아서 시야도 좋았다. 이거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올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2에서 30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이 이후로는 본격적인 바위길이 시작되는데 최대 65%이르는 급경사에 더해 그간 내린 비 때문에 돌들이 젖어있어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를 희롱하였다.
먼 곳 발리의 섬 끝에서 동이 트기 시작한다. 그말은 1시간 안에 정상을 찍어야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400m 정도 남았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아니 수직으로 400m였다.
정상을 향해 가는 등산객들. 눈 앞의 저 곳이 정상같이 생겼지만 저 곳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저런 봉우리를 몇개 더 지나야 진짜 정상이 나온다.
정상 도착!은 했는데 구색이 좀 초라하다. 아궁산의 정상에는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물이나 바위같은 것이 없어서 볼거리가 상당히 열악하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은 표고상 정상인 이곳보단 경치가 좋은 분화구쪽으로 이동한다.
가이드 왈 기백미터 더 가야 한대서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여기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더 이동하기로 했다.
분화구로 떠나는 사람들. 해가 슬슬 뜨기 시작하고 산의 실루엣이 드러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는건 사실 사진 보고 하는 생각이고 당시엔 속으로 여기서 미끄러지면 뒤진다 이 생각만 했다.
드디어 분화구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정상석은 없으나 들고 찍을 수 있는 금속 플레이트들이 여러개 있어서 사람들은 그걸 들고 사진을 찍는다.
아쉽게도 일출은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여기서 봤던 운해는 규모 면에서나 분위기 면에서나 살면서 본 풍경 중 손에 꼽히는 것이었다.
아궁산은 활화산이라 지금도 정상에선 연기가 나고 있다. 바람이 좋으?면 유황냄새도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버글버글한 사람들. 세상엔 부지런한 사람들이 참 많다.

정상에서 한참을 쉬면서 풍경을 눈에 담고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올라오면서 여길 다시 내려가야 한다니 정말 끔찍하군... 하면서 궁시렁거렸는데 불 켜지고 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아 신기했던 점 하나. 아궁산은 후지산과 같은 활화산임에도 정상 근처에 식생이 존재한다. 동남아 아니랄까봐 예쁜 꽃도 많이 피어있다.

이거 길 맞음? -> 맞음

여기로 내려가라고? -> 정답

하산하다 본 산맥. 인도네시아는 멋있는 산이 많다. 저 산도 뭐라고 했었는데 기억이 안난다.

계속 내려감

다시 숲이 나올 정도로 많이 내려왔다. 가이드가 집에 빨리 가고 싶은지 냅다 트레일 러닝을 해버린 탓에 하산 하면서 몇 번 자빠졌다. 돌길이면 차라리 나은데 숲길은 진흙이랑 이끼 투성이라 속도 내기가 쉽지 않다.

불 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어느새 많이 내려왔다.
살았다! 등반 시작이 23:30이고 이 때가 9:00이니 거의 9시간 반정도 탔다. 드라이버 아저씨가 왤케 빨리 왔냐고 놀라길래 내심 뿌듯했다.

스트라바는 배터리가 없어서 등산만 켜놨다. 무빙타임이 3시간 밖에 안되는 건 의왼데 쉬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았나보다.
감상을 정리해보자면, 같은 활화산임에도 작년에 갔던 후지산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아서 더 즐거웠다. 특히 정상 직전까지도 풀이 자라는게 신기했고 분화구도 후지산에 비해 무지 깊고 커서 놀랐다.
차이가 큰 부분은 아궁산이 후지산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거다. 등산로 대부분이 비법정탐방로로 느껴질 정도로 정비가 안 되어있는 데다 특히 POS2 이후 후반부는 클라이밍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경사도의 돌길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기상도 동남아답게 시시때때로 바뀌기 때문에 등반 외에도 옷차림과 체온조절에 더 주의가 필요했다. 후지산 트레일도 산책로와는 거리가 먼 편이지만 적어도 '죽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획득고도가 500m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수분 및 체온 조절이 더 용이했던 건 장점이었다. 이건 햇빛이 없는 시간에 올라간 게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잠에 든 드라이버가 정신차릴 때까지 기다리며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어두울 땐 안 보이던 베사키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도 길닭을 발견해서 가이드한테 저건 왜 키우냐고 물어봤는데 먹기도 하고 투계에도 내보낸다고 한다. 투계 어디서 볼 수 있냐고 슬쩍 물어봤는데 불법이라 그런 건지 알려주기 꺼려하는 느낌.
기다리고 있으니 발리식 커피를 한 잔 줬다. 발리식 커피는 터키식 커피처럼 커피 가루를 곧이 곧대로 물에 타 먹는 방식의 커피다. 제대로 침전을 안 시키면 안 녹은 미숫가루 마냥 입안에 커피가루가 굴러다닌다.
쉴만큼 쉬고 입구에서 대기중인 차량을 타고 숙소로 편하게 돌아왔다. 와서 보니 신발이랑 양말이 개작살이 나 있었는데 양말은 너무 심하게 더러워져서 그냥 버리고 왔다.

희한하게 컨디션이 괜찮길래 안 자고 치킨을 시켜 먹었다.
내가 이상한 것만 먹은지 모르겠으나 발리의 닭 요리란 대개 옛날 통닭 st의 뻣뻣하고 질긴 식감이 주를 이룬다. 황금올리브의 민족인 한국인이 맛 봤을 땐 훈수를 참기가 도저히 힘든 것이다.
현지인들 생각도 비슷한지 한국식 치킨이라는 Moon Chicken이 그랩 상위 랭킹에 있길래 시켜 먹어봤으나 그냥 그랬다. 먹어본 것 중에는 제일 부드럽고 튀김옷 퀄도 괜찮았는데 양이 적고 시즈닝이 너무 과자같아서 별로였다. 색깔도 푸르스름한게 영...

밤을 꼴딱 샜는데도 잠이 안 와서 치킨먹고 농땡이 피우다 공항으로 돌아갔다. 밤 10시 반 비행기라 호텔에선 8시쯤 나왔다.
저런 노상 식당에서 밥 먹어보는 것도 로망 중 하나였는데 결국 못 해봤네.

발리 공항은 셀프체크인이 없어서 난생 처음 배낭을 수하물로 부쳤다.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60L 살 걸 그랬다.

이제 진짜 집에 간다. 밤 비행긴데 연착돼서 졸려 죽을 뻔했다. 차라리 등산을 하면 했지 가만 앉아서 기다리는 건 도저히 취향에 안 맞는다.

공항 게이트 앞에 붙어있던 그림인데 작별인사가 꽤 과격하다. 뒤에 목검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저씨가 수 틀리면 바로 아구지 돌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계시는 것이 꽤나 인상깊다.

이륙 직전에 듣는 노래를 캡처해놓는 버릇이 있다. 이번 끝곡은 redrum이었는데 딱히 큰 의미는 없다.
이렇게 6박 8일간의 발리 여행은 끝났다!! 다음은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