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체크인의 묘미는 아침이 되면 새로운 모습을 언박싱할 수 있다는 것. 호텔 주위를 둘러보니 조그만한 사원이 하나 있어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땐 몰랐다. 발리에는 한 집 걸러 한 집마다 사원이 있다는 걸.

시간이 이르다보니 열려있는 밥집이 없어 그랩으로 배달을 시켰는데 외식 물가가 충격적인 수준이라 앱 오류가 아닌가 의심했다. 사진의 볶음밥이 배달비 포함 5천원도 하지 않는다.
근데 입맞엔 안 맞아서 반 정도 남겼다. 강황밥에 레몬그라스가 들어가는데 얘 때문에 밥에서 차량용 방향제 냄새가 솔솔 난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음식에 들어가 있는데 아주 악질이 따로 없다.
곁들임으로 나오는 똄뻬(중앙 하단의 에너지바같이 생긴 것)와 이름모를 두부 튀김(좌상단) 역시 기름에 절어있는 식감이라 내겐 쉽지 않았다. 레몬그라스밥도 그렇고 지인은 맛있게 먹던데 그냥 내 입맛에 안 맞는가보다.

오늘은 발리 오기 전 머리에 넣고 온 두가지 중 하나인 유적지 탐방을 하는 날이다.
Get Your Guide라는 플랫폼을 이용해서 현지인 가이드를 고용했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표준근로시간을 꽉 채워서 발리의 곳곳을 탐방하는 투어였다. 스팟간 이동은 물론 호텔 픽업도 해줘서 잠자코 따라 다니면 된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택시비나 투어비나 그게 그거일 듯 해서 그냥 큰맘먹고 예약했다.

오전 9시에 가이드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투어가 시작되었다. 큰 길로 갈 땐 노잼이었는데 골목길로 들어가면서 점점 로컬스러운 분위기에 취해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낚싯대같이 생긴 장식물이 집집마다 걸려있는게 눈에 띄었다. 미스터 포포(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펜조르(Penjor)라고 2주 전 열린 갈룽안 축제에서 쓰던 장식물이라고 한다. 1달하고 7일동안 걸어놓은 뒤 모아서 태우는 축제가 또 있단다.

발리는 널린게 사원이다. 교토 갔을 때 여긴 신사가 골목마다 있다며 놀랐는데 발리는 더 심하다. 과장 안 보태고 집보다 많은 것 같다.
생긴 것도 다 제각각인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고 선만 안 넘으면 어느정도 개성을 표현하는 게 허용되는 것 같다. 석상 파는 곳 역시 사원만큼이나 많던데 우리가 스티커 사서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처럼 그들 역시 사원꾸미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고아 가자(Goah Gajah)
첫 번째 목적지는 고아 가자(Goah Gajah) 사원이다.
고아 가자는 발리의 토착신앙과 힌두교, 불교가 합쳐진 독특한 양식을 띄고 있다. 발리가 자기 식대로 힌두교를 받아들이며 '발리식 힌두교'가 탄생했고 이후 불교도 비슷한 방식으로 수용했다고 한다. 발리 사람들의 유도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사원에서 가장 유명한 도깨비 동굴 입구. 자연암벽 내부를 할로윈 호박 파내듯이 깎아서 만들었다.
세인(世人)들은 으레 여기 입구에서 분위기 있는 사진을 찍지만 나는 줏대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사진은 이 악물고 찍지 않는다.

내부의 분위기는 상당히 신비롭다. 우리나라의 석굴암과 유사하나 그보단 조금 더 원시적이고 종교적인 느낌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 입장에선 음산함도 느껴진다. 뭔가 다크소울 생각도 나고.
내부엔 향을 잔뜩 피워 놓았는데 어두컴컴한 데다 환기가 안 되니 공기가 매캐해서 화생방 훈련의 트라우마가 엄습한다. 오래 있기는 힘들어서 잠깐 둘러보고 나왔다.

동굴을 나오면 이런 분수대와 연못 비슷한게 보인다. 어깨까지 이끼가 올라와있는 거 보니까 우기 때면 어깨까지 물이 차는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
이제 불교 사원으로 넘어간다. 가는 길이 열대 우림 그 자체라 바닥이 무지 축축해서 까딱하다간 머리가 두쪽 나는 수가 있다. 사진만 봐도 젖은 나무와 이끼냄새가 느껴지는 듯 하다.
코너를 돌면 시냇물 한가운데에 큰 바위가 놓여있다. 누가 깎았는지 모를 조각도 위에 있고 옆에 석조건물 잔해로 보이는 돌덩이도 덩그러니 놓여있다. 게임에서 버려진 사원, 잊혀진 왕궁 이런 제목이 붙은 맵 탑험하는 기분이다.
고목과 돈 꼴리오네를 끝으로 이제 고아 가자는 다 돌아봤다.
박물관

이 다음 코스는 자그마한 전시관이었는데 선사시대부터 1800년대까지 발리 역사를 연대기별로 정리해 둔 고고학 박물관에 가까웠다.
전문가가 직접 나와 한 시간이 넘도록 열변을 토해주셨으나 죄송스럽게도 큰 흥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난 전시된 것 말고 진짜 현장에 있는 걸 보고 싶다고...
밥(점심)
박물관을 나서니 12시 반쯤 되었는데 미스터 포포가 알잘딱으로 식당에 데려다 줬다.
현지인이 추천하는 로컬 맛집이란 얼마나 대단할까 기대를 잔뜩했으나 막상 도착한 곳은 백인이 넘실대는 전형적인 관광식당이었다. 가격도 바가지 수준으로 비싸기에 주먹이 부르르 떨렸으나 맛은 그냥저냥 있어 참았다.
회상하건데 여기서 먹은 소또 아얌이 사실 제일 낫긴 했다.
휴가의 특권 낮술도 때려본다. 인도네시아 특산 맥주 빈땅을 먹어봤는데 필라이트가 생각나는 맛이다. 이거 인생맥주라 그러는 사람은 맥주가 처음이거나 악의를 띄었거나 둘 중 하나로 간주할 것이다.
구눙 카위(Gunung Kawi)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간 곳은 구눙 카위(Gunung Kawi) 사원이다. 돌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왕족과 귀족을 모시는 사원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작 연대는 미상인데 11세기 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사원 안에 있는 커피샵인데 꽃으로 장식을 예쁘게 하셨다. 발리 사람들은 꽃을 정말 좋아하는 듯한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예쁜 꽃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어느정도냐면 야생화만 꺾어도 웨딩부케를 만들 수 있다.

10분정도 들어가면 열대우림속에 숨어있던 석탑들을 만날 수 있다. 석탑은 총 11개인데 고대인들이 발휘한 장인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관광객도 많이 없어서 천천히 노닐기 좋다.
문화재 보호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옆에선 벼농사를 짓고 있다.
는 외국인의 시선이고 발리 힌두교엔 수박(Subak)이란 관개시스템이 있어서 사원 근처에 농지가 들어서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물 분배 결정이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농사 과정 전반에 걸쳐 종교적인 의례가 함께 한다고.

성수 가져가지 마시오.
지금까진 왕족 구역이었고 귀족 구역은 계곡을 따라 더 들어가야 한다. 여기 접근하는 건 문제가 하나 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난생처음의 맨발 트레킹을 발리에서 시작해버렸다.
가는 길. 감성 죽여줌.
드디어 도착. 어프로치가 힘든 만큼 진짜 기도 드리러온 현지인 말고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아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유적지를 감상했다. 기온도 아까에 비하면 훨씬 선선해서 쾌적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조금 더 가면 또다른 길로 이어지는 문이 나오는데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풀이 자라 있는 걸 보아 인적이 오랫동안 끊겼던 것 같다. 혼자 왔으면 가봤을텐데 가이드 표정도 안좋고 하길래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다.

구눙 카위를 마지막으로 투어는 끝이다. 아쉽다기 보단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며 쾌재를 불렀는데 고온다습한 기후에 사원을 오르내리며 유격훈련을 한 탓에 탈진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가 오후 3시였다.
호텔로 돌아온 후 고생해준 미스터 포포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바로 나시고랭 하나랑 넓은면 쌀국수를 배달시켰다.
젓가락 달라는 걸 깜빡해서 옆 마트에서 음료 하나 사고 바디랭귀지 하면서 받아왔는데 일회용 수저 필요 없어요 자동 체크는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사람을 개열받게 만든다.
클라우드 세븐 저건 탄산음료인줄 알고 샀는데 알고보니 술이었다. 세모금까지는 걍 탄산이 세서 정신 없는 줄 알았는데.
밥도 먹었겠다 수영복 사러 가까운 데 있는 로컬 시장 스니먁 플리마켓에 갔는데 문을 닫았다. 노상에서 흥정하면서 사는게 로망 중 하나였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걸어서 5분 거리의 스미냑 스퀘어로 선회했다.
어쩌면 더 잘 된게 여긴 ATM이나 카페처럼 웬만한 현대 편의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어 이틀만에 환전도 하고 H&M가서 수영복도 괜찮은 가격에 건질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울며 겨자 먹기보단 울며 캐비어 먹기에 가까운 듯 한데.
그 유명한 인도네시아 짝퉁폴로도 직관했다. 폴로티 한 개에 3만원이 안 되는 둘도 없을 갓성비를 자랑한다.
토막상식) 인도네시아의 폴로 랄프로렌은 우리가 아는 폴로 랄프로렌의 상표권을 긴빠이해서 만든 전혀 다른 브랜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짭이란 소리다.
발리에 왔는데 마사지를 안 받아 볼 수는 없지 싶어 돌아가는 길에 마사지샵을 예약해뒀다. 아직 오토바이 택시 탈 짬밥은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냥 걸어갔는데 자동차며 오토바이며 매드맥스마냥 내지르는 탓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게 한 두번이 아니다.
인도 정비도 안 되어있는 곳이 많고 발리라는 곳이 확실히 도보 친화적이지는 않다. 마사지 끝나고는 얌전히 차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발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많은 발리 사람들이 매일 향을 피우거나 축제를 여는 등 종교적 전통을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켜나가고 있는데 종교가 삶과 분리된 걸 넘어 반감을 가지기도 하는 한국인의 시각에선 이러한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틀차 여행은 그러한 발리인의 삶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 그리고 하루종일 한국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 마사지샵에서 몇 명 본 것 빼고. 한국 블로그 소개글 보고 간 건데 한국사람들 행동패턴이 다 비슷한가보다.
여튼 이렇게 이틀차는 끝. 내일은 지인들이 머무르고 있는 짱구로 이동한 다음 메데위에 있는 일정에 참가할 예정.